“예민해서 약도 못 먹어요” – 자율신경 민감형 체질이라는 이름 없는 병
안녕하세요. 백록담한의원 입니다.
환자 이야기
오늘은 한 환자분의 이야기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이분은 벌써 1년 넘게 가슴이 조이는 느낌 때문에 식사를 못 하십니다. 목에 뭔가 걸린 것 같고, 밥을 삼키면 숨이 막힐 것 같고… 그래서 밥상 앞에 앉아도, 젓가락을 들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고 하셨어요.
속이 안 좋아서 스리반정을 먹어도 별 소용이 없었고, 병원에서는 식도염일 수도 있다며 약을 주더랍니다. 하지만 약을 먹고 나면 더 불안하고, 더 속이 거북해지고, 밤에 잠도 잘 안 와요.
그러다 정신과를 찾아가보셨는데—처방받은 약이 전보다 용량만 좀 달랐을 뿐인데,
“약이 너무 세게 들어요… 도저히 못 먹겠어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공감
여러분, 이런 얘기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분명히 의사선생님은 안전한 용량이라고 했고, 보통 사람들은 잘 참고 먹는 약인데—나는, 너무 예민해서 못 먹겠는 거예요. 이런 분들, 정말 많습니다.
자율신경 민감형 체질
그리고 저는 그럴 때마다 이렇게 말씀드려요. 그건 단순히 ‘예민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고요. 이건 ‘자율신경 민감형 체질’이라는, 아직 이름조차 정식으로 붙지 않은 신경계 탈조절 상태의 한 양상입니다.
감각의 증폭
이 체질의 사람들은 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감각이 증폭돼서 느껴져요. 심장 뛰는 소리, 배에서 가스 차는 느낌, 목구멍에 뭐가 걸리는 느낌… 남들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는 자극이 이 사람들한테는 하루 일상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감각이 되는 겁니다.
문제의 심각성
이분도 처음엔 단순히 가슴이 답답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점점 밥이 안 넘어가고, 체중은 빠지고, 음식을 아예 두려워하게 됩니다. 배는 항상 부글거리고, 가스는 잘 나오는데 시원하진 않고… 숨이 막히는 느낌이 자꾸 들다 보니, 밖에 나가기도 싫어지고 기립성 저혈압, 가슴 두근거림, 빈맥까지 따라옵니다.
해결책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건 딱 하나입니다. 이건 약을 더 세게 넣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용량이 아니라 ‘반응하는 몸’ 쪽에 있어요. 이런 분들은 뇌와 신경계가 이미 탈진한 상태입니다. 몸이 자극을 거를 수 있는 힘이 없어진 거예요.
회복 방법
- 감각의 역치부터 올려야 합니다. 이건 약으로 될 수 없습니다. 침 치료, 복부 자율신경 안정화, 횡격막을 여는 호흡 훈련… 이런 것들을 통해 ‘내가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 위장 문제를 감각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음식을 소화 못 시킨다기보다는, ‘소화하려는 행위 자체가 신경계에 위협’이 되는 상태입니다. 위가 나쁜 게 아니라, 위에 대한 인식과 감각이 망가진 거예요.
- 약물은 도구일 뿐입니다. 약을 먹고 안 좋아졌다고 해서 무조건 끊는 게 아니라, ‘약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을 만든 다음’에 다시 접근해야 해요. 예를 들어, 3일에 한 첩, 소량 한약, 저용량 약물로 조심스럽게 노출시키면서 반응성을 줄여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결론
이분처럼 자율신경이 무너진 상태에서 벤조디아제핀, SSRI, 소화제를 다 써봤지만 오히려 증상이 더 악화되는 환자들, 정말 많습니다. 이걸 단순히 “예민한 성격”, “심리적 문제”로 치부하면 안 됩니다. 이건 신경계 설계의 문제입니다. 신체가 자극을 필터링하지 못하고, 감각이 그대로 신경계에 꽂히는 상태. 그게 바로 자율신경 민감형 체질입니다.
오늘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약이 약이 되기 위해선, 약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을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이 체질은 병명이 아니고, 치료가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지금의 의학 체계가 이 신경계의 민감함을 아직 언어화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신경계를 다시 신뢰할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것.
그 시작은, ‘약이 너무 세게 들어요’라는 말에 귀 기울이는 것부터입니다. 감사합니다.
#자율신경민감체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