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염은 나았는데, 왜 계속 장이 불편할까?
과민성대장증후군 vs 장염,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
1. 익숙한 불편함, 낯선 진단
안녕하세요, 백록담 한의원 입니다. 오늘은 많은 분들이 경험하지만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주제를 다뤄보려 합니다. 한번쯤은 이런 경험 있으셨을 겁니다. 장염을 앓고 나서 설사도 멎고 열도 떨어졌는데, 며칠이 지나도 복통이 남고, 식사를 하면 여전히 배가 부글부글 끓고, 화장실에 가도 개운하지 않은 느낌. 병원에서는 장염은 다 나았다고 하지만, 정작 환자 입장에서는 ‘전혀 끝난 느낌이 아니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럴 땐 우리는 과연 이 증상을 장염의 연장선으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이미 기능성 장 질환, 즉 IBS로 넘어간 걸까요?
2. 장염과 IBS,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먼저 가장 기본적인 구분부터 해보겠습니다. 장염은 외부에서 들어온 병원균이나 바이러스, 혹은 독소에 의해 생기는 염증성 질환입니다. 명확한 원인이 있고, 대부분의 경우 며칠 내에 회복되죠. 반면, 과민성대장증후군(IBS)은 검사상으로 특별한 이상은 없는데 배가 아프고, 가스가 차고, 설사나 변비가 반복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기질적 병변 없이, 기능적으로 불균형한 상태죠. 장염은 열이 나거나 갑작스러운 설사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고, IBS는 스트레스나 식사와 관계된 복통, 잔변감, 변비·설사 번갈아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장염은 급성, IBS는 만성이라는 기준으로도 나뉘긴 합니다.
3.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임상에서 실제 환자들을 보다 보면 이 두 가지를 그렇게 깔끔하게 나누는 게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장염 이후, 모든 증상이 깔끔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복부 불쾌감, 장의 민감성, 음식 반응이 예민해지는 증상들이 남아서 몇 주, 길게는 몇 달 동안 지속되는 케이스가 꽤 많습니다. 이때 환자들은 헷갈립니다. ‘장염이 아직 안 낫는 건가?’ ‘내가 혹시 IBS가 된 건가?’ 사실 이런 상태는 엄연히 존재하는 개념입니다. 바로 PI-IBS, 즉 포스트 인펙셔스 IBS라는 중간 개념입니다.
4. PI-IBS, 장염과 IBS 사이의 그 어딘가
PI-IBS는 말 그대로 장염 이후에 생기는 과민성 대장 증후군입니다. 장염이 완전히 낫더라도, 그 과정에서 장점막이 손상되거나 장내 미생물 균형이 깨지고, 장신경계의 과민 반응이 생기면 이전에는 없던 IBS 증상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에 ‘롱코비드’라는 개념이 생겼듯이, 감염 이후에 남는 후유증이 꼭 호흡기나 피로에만 국한된 게 아닙니다. 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염증은 사라졌지만, 그 여파가 장기적으로 남는 경우가 있다는 거죠.
5. 왜 어떤 사람은 오래 앓고, 어떤 사람은 금방 낫는가
그럼 왜 이런 회복 지연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건 아닐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작용합니다. 첫째, 기저 체질입니다. 원래 장이 예민하고 스트레스에 민감했던 사람일수록 장염 이후에도 회복이 더디고 증상이 장기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둘째, 자율신경계의 회복력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소화 기능이 확 떨어지는 사람이라면 장염이라는 스트레스 이후에도 장운동이 쉽게 복구되지 않습니다. 셋째, 장내 미생물 구성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장염 이후에도 미생물 균형이 금방 복원되지만, 어떤 사람은 dysbiosis 상태가 장기화되며 장내 발효·가스 생성이 계속되는 겁니다. 이런 요소들이 조합되면, 장염이 끝나도 IBS로 전환되는 상태로 이행될 수 있는 거죠.
6. 한의학적 관점 – 병은 끝났지만 회복은 끝나지 않았다
한의학에서도 이 문제를 오래전부터 인식해왔습니다. 고대 의서 상한금궤에는 ‘여병(餘病)’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즉, 병은 끝났으나, 남은 병리 상태가 여전히 몸에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장염 이후에도 기허, 습열, 담음, 간비불화 같은 다양한 변증이 가능하고, 이때는 단순히 장염 치료처럼 위생 관리나 해독이 아니라 개인의 회복력을 돕는 전신 치료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시점부터는 단순한 감염 병리보다는 기능적 불균형과 체질적 약점을 회복시켜주는 방향으로 치료가 전환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7. 치료 전략 – 회복 설계가 핵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급성기 장염이라면 당연히 염증 억제, 수분 보충, 병원균 제거가 중심입니다. 하지만 회복기에는 방향이 달라집니다.
- 장점막 보호를 위한 한약 (예: 황련해독탕, 생강반하탕 변형)
- 장운동을 조절하고, 내장과민성을 낮춰주는 침치료
- 복부 긴장을 풀어주는 복식호흡, 장 마사지
- 장내 미생물 재균형을 위한 식이 조절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스트레스 조절입니다. IBS의 핵심은 장-뇌 축입니다. 감정의 흔들림이 곧장 장으로 전달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마음의 회복 없이는 장의 회복도 없습니다.
8. 장염과 IBS는 끊어진 선이 아니다
정리해보면, 장염과 IBS는 명확하게 다르지만 현실에서는 그 사이에 수많은 회색지대가 존재합니다. 특히 장염 이후에도 장 증상이 계속되는 사람이라면 그 상태를 단순히 ‘장염이 오래 가는 중’으로 보기보다는, ‘회복력이 지연되고 기능이 무너진 상태’로 봐야 할 때가 많습니다. 장염은 끝났지만, 내 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지금이야말로 장 회복 설계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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