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에서는 이상 없다는데 하루 종일 힘이 없어요

인천 자율신경실조증 진료실에서 마주한 경계선

“검사에서는 이상 없다는데… 하루 종일 힘이 없어요.”

그 말 속에는 이미 수개월간 이어진 피로가 겹겹이 쌓여 있다. 겉으로 보기엔 단정한 옷차림, 멀쩡한 걸음걸이지만, 앉는 순간 어깨가 조금 처진다. 그 무게를 알고 있기에 나는 이 표정을 놓치지 않는다.

이런 환자들은 대개 병원 몇 곳을 거쳐왔다. 혈액검사, 심전도, 엑스레이까지 해도 ‘정상’이란 소리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지만, 다음 날 아침 몸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스스로도 ‘내가 예민한 건가?’라는 의심을 품지만, 몸의 변화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너지고 있는 과정’이 검사의 기준선에 걸쳐 있다는 것이다. 수치로는 아직 병이 아니지만, 생리적 완충력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경계선에 있다는 건, 단지 모호한 상태가 아니라 앞으로의 방향이 결정되는 갈림길에 서 있다는 뜻이다.

아침부터 무너진 하루

“눈 뜨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려요. 숨이 막히는 것 같고, 벌써 하루가 시작된 느낌이 싫어요.”

환자는 알람 소리를 듣기도 전에 깬다고 했다. 밤새 교감신경이 꺼지지 않은 패턴이다. 자야 할 시간에도 몸은 달리고 있었고, 아침이 되면 이미 피로의 절반은 채워져 있다.

세면대 앞에서 양치를 하다 멈춘 채 숨을 고른다고 했다. 이는 단순한 체력 부족이 아니라, 자율신경이 ‘휴식 모드’로 전환하지 못한 신호다. 밤새 가동된 보일러처럼 몸은 데워졌는데, 물통의 물은 점점 말라 있다.

아침 공기를 들이마셔도, 안쪽의 뜨거움은 식지 않는다. 아침부터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 하루 전체의 리듬이 이미 깨진다. 두뇌는 스트레스 상황에 맞춘 호르몬을 계속 분비하고, 말초 혈관은 불필요하게 조여 있다.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하루치 체력의 절반이 사라지는 셈이다.

낮 동안의 불안정

출근길에는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갑다. 지하철 손잡이를 잡은 손끝이 얼음 같지만, 사무실에 들어서면 갑자기 얼굴로 열이 몰린다. “회의 중에 얼굴이 확 달아올라서 시선을 피하게 돼요.”

이건 단순히 더위·추위의 문제가 아니다.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스위치가 적절한 타이밍에 전환되지 않는다. 원래라면 외부 온도·스트레스 상황에 맞춰 혈류가 손발과 얼굴을 오가며 조절돼야 한다. 하지만 경계선 상태에서는 이 전환이 느리고, 때로는 아예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결국 체온 분포가 엇박자가 되고, 사람 앞에 서는 순간엔 얼굴이 화끈거리고, 혼자 앉아있을 땐 손끝이 시리다. 이런 패턴은 몸이 ‘위기 신호’와 ‘안정 신호’를 동시에 보내는 혼란 상태다. 뇌와 말초가 서로 다른 지령을 내리고, 혈관은 그 혼란 속에서 끊임없이 수축과 확장을 반복한다.

소화와 순환의 연결

점심을 먹으면 배가 더부룩해지고, 오후엔 눈꺼풀이 무겁다. “먹으면 힘이 나야 하는데, 오히려 졸려요. 손발은 여전히 차고, 얼굴만 달아올라요.” 이는 장–뇌 축의 불안정과 밀접하다.

음식이 들어오면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어 소화가 진행돼야 하지만, 경계선 상태에서는 교감신경의 긴장이 여전히 높아 위장관 혈류가 확보되지 않는다. 위장은 음식물 소화를 위해 힘을 쓰지만, 말초 혈관은 여전히 수축돼 있다.

결국 소화 과정에서 나와야 할 에너지는 확보되지 않고, 오히려 피로감이 누적된다. 이렇게 반복되면, 먹는 행위 자체가 ‘회복’이 아니라 ‘부담’으로 변한다.

검사에서 보이는 경계선 신호

심박 변이도(HRV)는 교감 우위, 즉 긴장 상태에 치우쳐 있다. CRP는 0.6, 아주 미세하지만 염증 반응이 올라가 있다. 심박수와 혈압은 정상과 경계 사이.

“다 정상이에요”라는 말에 안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치는 약물 처방의 기준에는 미치지 않지만, 이 상태가 지속되면 자율신경의 기민함이 떨어지고, 염증이 서서히 조직에 스며든다. 경계선의 의미는 단순한 ‘아직 괜찮음’이 아니라, ‘지금 멈추지 않으면 곧 병이 될’ 신호다.

밤새 켜진 보일러

보일러는 꺼지지 않는다. 물을 데우는 열은 계속 나오지만, 물통의 물은 점점 말라간다. 배관은 과열로 변형된다. 이 보일러가 바로 HPA 축이다.

밤새 돌아간 보일러를 아침에 끄려고 해도, 이미 열은 배관 깊숙이 퍼져 있다. 창문을 열어도 방 안 공기가 식지 않는 느낌, 그것이 지금의 몸이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물은 마르고, 배관은 결국 새기 시작한다.

한의학적 해석

간기울결(간의 기운이 막혀 흐르지 못하는 상태)에서 화열이 생기고, 그 열이 오래가면 음이 소모돼 허열로 변한다. 비위는 기운을 만들 힘을 잃고, 담음(끈적한 노폐물)이 쌓인다. 기혈이 약해지면 회복 탄성은 사라진다. 열은 위로만 오르고 아래로는 힘이 내려가지 않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이건 단순한 스트레스 반응이 아니라, 장기간의 생리적 불균형이 고착된 패턴이다. 회복을 위해서는 열을 내리고, 진액을 채우고, 순환의 길을 다시 열어야 한다.

치료와 생활 루틴

치료는 불을 내리고, 물을 채우고, 배관을 정비하는 것. 소간해울·청열양음·건비화담을 기본 축으로 HRV 호흡 훈련, 수면 위생 회복, 저염증 식단, 저강도 지속 운동을 병행한다.

  • 밤 11시 이전 취침, 취침 전 호흡 명상으로 교감신경을 끈다.
  • 아침에는 따뜻한 물로 배관을 데우고, 카페인은 오전까지만.
  • 손발이 차면 온찜질로 혈류를 깨운다.
  • 하루 30분의 유산소는 가볍게 땀이 날 정도가 좋다.

이 작은 루틴이 보일러의 불을 서서히 줄인다. 경계선에서 회복하는 건 병이 된 뒤보다 훨씬 쉽다. 아직 불씨일 때 꺼야 한다.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다.

진료 관련 안내 사항

진료 시간:
월-금 오전 10:00 - 오후 7:00
점심시간 오후 1:00 - 2:00

※ 블로그를 통한 개별 상담은 진행하지 않습니다. 예약 및 진료 관련 문의는 네이버 플레이스 또는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확인해 주세요.

백록담 한의원
인천 연수구 컨벤시아대로 81, 송도 드림시티 3층

#자율신경실조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