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자꾸 뛰고, 목이 조여오는 느낌이 들어요
안녕하세요 백록담한의원 입니다.
“스트레스는 안 받는데, 몸이 이상해요”
진료실에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별로 스트레스 받는 일도 없는데요, 가슴이 자꾸 뛰고, 목이 조여오는 느낌이 들어요. 갑자기 어지럽기도 하고요. 혹시 심장이 안 좋은 건 아닐까 싶어서 병원도 가봤는데, 검사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네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환자분들은 대개 뚜렷한 정신적 불안은 없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자율신경계에 불균형이 생긴 상태입니다. 본인은 감정을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몸이 먼저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감정은 억눌렀는데, 신체는 반응한다
이런 상태는 종종 감정 억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위험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여긴 환경에서 자라난 경우, 혹은 늘 강해야만 했던 역할을 수행해온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훈련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화가 나도 화가 났다고 말하지 않고, 불안해도 불안하다고 느끼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표현되지 못한 채 몸 안에 머물게 됩니다. 이런 억눌린 감정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신체적 경로를 통해 표출되기 시작합니다. 가슴 두근거림, 목 조임, 식은땀, 어지럼, 수면장애 같은 증상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을 한의학에서는 '울(鬱)'이라고 합니다.
억울할 울, 응축될 울. 감정이 흘러가지 못하고 막힌 상태, 그래서 기운도 흐르지 못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한의학적 해석: 기체, 상역, 울결
- 기체(氣滯): 기의 흐름이 정체되어 답답함, 트림, 한숨 같은 증상을 유발합니다.
- 기상역(氣上逆): 기가 아래로 흐르지 못하고 위로 치솟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목이 막히는 느낌을 줍니다.
- 간울(肝鬱): 스트레스와 억울함이 간의 기능을 막아 화(火)로 전이되기 쉬운 상태를 만듭니다.
이런 기전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자율신경의 불균형이 생기고, 감정과 신체가 분리된 듯한 상태가 나타나는 겁니다. 특히 가슴과 목에 집중되는 증상은 횡격막을 기준으로 위쪽으로 기운이 치솟는 상역증(上逆證)의 일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치료 전략: 감정 이전에 몸부터
이러한 상태에선 단순한 심리 상담이나 약물치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정신과적 개입도 제한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몸의 상태를 안정시키고, 감정이 올라올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한의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 횡격막 개방과 흉복부 긴장 해소: 침치료나 약침 등을 통해 횡격막 주변의 기운 정체를 풀고, 숨을 깊이 들이마실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줍니다.
- 기상역 안정화: 위로 치솟는 기운을 가라앉히는 처방—예를 들어 온담탕, 가미온담탕, 시호계열 처방 등이 활용됩니다.
- 기순환 활성화: 억눌린 기운을 순환시키기 위해 복부와 흉부 사이의 순환경로를 확보하는 침치료나 추나치료를 병행합니다.
이와 함께 환자에게는 자신의 증상을 '말로 표현하는 훈련'을 유도합니다. 예를 들어, "가슴이 두근거릴 때 무슨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지" 혹은 "이 증상이 생기기 직전에 어떤 장면이 있었는지"를 관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감정을 억지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몸의 신호를 관찰하고 연결짓는 훈련입니다.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오래 눌러놓은 겁니다.
불안하지 않다고 말하는데, 몸이 계속 이상신호를 보낸다면—그건 불안이 없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억누르고, 인식하지 않도록 훈련된 감정이 몸을 통해 표출되고 있는 겁니다. 이런 경우, 단순히 마음을 다독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몸이 먼저 풀려야, 감정이 따라 올라올 수 있습니다. 감정의 언어가 없을 때, 몸의 언어로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것이 우리가 이런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첫 번째 진료입니다.